내가 사랑했던 남자들

2017.11.26 00:51

MsVictoria Views:9



내게 사랑은 언제나 미완성이었다.
내 나이 열 일곱에 첫 키스를 해준 그 사내 아이는 언제나 얼굴에 수줍음을 담고 있었다. 나는 쓸데없이 나대는 것을 절대 용납 못하는 무서운 엄마 몰래 가슴 떨면서 그 아이와 데이트를 하곤 했다. 데이트래야 요즈음 생각하면 궁색하기 짝이 없다. 무더운 한 여름 밤에 동네 사람들이 너나 없이 드나드는 대감집(강화도령) 울 안에 약수를 뜨러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리 둘은 그때 서로 말은 안 했지만 그렇게 만나다보면 결혼할 것이라고 어렴풋이들 생각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둘 다 참으로 순진했었다. 그는 군대를 가야했고 나는 많은 여자들이 기대해도 좋을 만한 남자의 끈질긴 구애로 인해 웨딩마치를 올리게 됐다.

그 남자와 아들과 딸을 낳으면서 남들 보기에는 재미있고 유쾌하게 잘 사는 좋은 부부처럼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 초 부터 삐걱거렸다. 결혼 28년 내내 나는 어떻게 하던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버텼지만 결국 심한 우울증에 걸려 죽음이 곧 문전에 들이닥친 것 처럼 힘들게 살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여행을 가면서 그의 베개 위에 편지를 써 놓고 간다. 물론 사랑의 편지다. 내가 여행에서 돌아와 보면 그 편지가 베갯 머리 근처에서 그대로 놓여 있다. 편지를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도통 아무 말도 없다.

얼마 전에 읽은 책 ‘말을 듣지 않는 남자’를 보니 남자들의 뇌 구조가 여자와 대화할 수 있는 세포가 빵점이란다. 남자가 이런 것을 왜 진작 몰랐을까? 이런 남자와 근사한 대화를 이끌어 내려고 했던 내 노력이 얼마나 허사였는지를 이 나이에야 알게 되다니. 류시화의 시 처럼 지금 알고 있는 것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결혼은 무난히 어려운 고개를 넘어 가지 않았을까?

동과 서의 네 시간차를 두고 얼굴도 모르면서 이야기로만 사랑을 엮어가던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던져주는 매력이 나를 달뜨게 했다. 더우기 그의 문학적 이해와 방대한 지식이 나의 정신 세계를 끌고갈 만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 그곳으로 생활권을 옮겨야하나 아니면 그쪽에서 이리로 와야 하나면서 시간을 다투며 사랑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Toll Free 전화선을 가설 해 준 남자다. 당시 어마어마하게 비싼 전화 요금을 감내하면서 24시간 전화 통화를 하게 해준 그의 배려. 우리는 시공간을 초원해서 함께 커피를 마시고 야참을 먹고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를 위해 매일 아침 우체통에 편지를 던지고 출근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리움에 목말라하며 잠든 시간은 단지 육 개월 동안 이었다. 이런저런 환경이 몰아치면 사랑이라는 것은 맥 못추고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는 것도 이 때 알게 됐다.

이렇게 사랑병을 지독히 앓다가도 다시 다가오는 사랑을 거부 못하는 내게 나타난 마지막 남자가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만물의 언어’의 가장 본질적이고 난해한 부분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우주가 무한한 시간 속으로 여행 할 때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은 것 처럼, 그를 보는 순간 어떤 설명도 필요없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 마지막 사람이 될꺼야’ 그렇게 확신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과 밤에 서로 나누는 언어들은 금빛과 은빛처럼 찬란했다. 첫 사랑을 만날 때 처럼 가슴 떨림도 시작됐다. 내 정신 세계의 반쪽을 찾았다고 좋아하며 행복에 빠져 있던 어느날 갑자기 뚝 끊어진 그 남자의 전화. 한 마디 마지막 인사도 없이 이 세상과 거리가 먼 곳으로 가 버린 그 남자의 소식을 타인으로부터 들었을때의 그 절망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꽃을 무척 사랑하던 남자. 봄 뜨락에 보랏빛 꽃이 피어날 때면 그가 내게 남겨준 보석같은 글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새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올까? 식지않은 열병을 억지로 끊어내야 하는 힘든 시간을 맞이한 것은 내 나이 예순이 될 무렵이었다.

우리는 이 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거나 내가 떠나와야 할 경우를 만난다. 헤어짐은 뜨겁게 사랑했던 만큼의 아픔 혹은 더 이상을 겪어야 한다. 지나고보니 격렬했던 사랑도 모두 꿈같이 지나간다. 추억만 하나 둘 남기고 형체없는 사랑이란 놈이 숨어버린다. 지나간 사랑은 다시 오지 않는다. 단지 새로운 사랑이 올 뿐이다. 숲 속에 불길이 활활 타 오르다 죽은 자리에 재가 남고 그 속에서 새 싹이 돋아나서 다시 환희의 계절을 맞이하듯 사랑도 그렇다. 아무리 말해도 사랑얘기는 끝이 없다. 그래도 나는 사랑하며 살고싶다. 칠 십이 눈 앞에 내다 보는 이 나이에 다시 사랑이 찾아와 내 가슴에 문을 두드리면 나는 어떻게 맞이 할까?
아주 오래전에 재미로 내 손금을 봐준 친구 영이 말 했다. “말년에 애인은 없어도 친구는 있겠다 얘.” 영의 말대로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고 열정이 아닌 믿음직한 친구를 만난다면 더 이상 내게 미완성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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