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근<부경대 교수. 문학평론가>
 
 
  1.들어가면서
 
   텍스트는 미완이다.
  어떤 작품도 절대적 완성에 다다를 수 없고 어떤 독자도 완벽한 해석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의 의식계를 문자화하려는 작가는 이 때문에 적합한 언어와 표현양식을 찾기 위하여 진력을 다한다. 따라서 담론과 텍스트에 대한 열망은 어느 시대를 가리지 않고 글쓰기에서 나타나게 된다.


지적, 정서적 즐거움을 일깨우려는 욕망은 기존의 사회 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행위에 해당한다. 일탈행위로서 글쓰기도 고전주의 시대이든 근대 사실주의 시대이든 예외가 아니었고, 나아가 IT시대도 마찬가지다. 현대에 이를수록 글쓰기와 글 읽기를 통한 표현의 욕망이 더욱 강해지고 있는 현상은 직전의 문예사조에 대한 반동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글쓰기에 대한 자유를 빼앗기지 않고 고정된 화술에 감금당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전위적인 텍스트가 그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된다.


  수필은 내적 외적 체험을 표기하는 텍스트다. 작가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수필은 속성상 과거라는 시공과 구태의연한 패러다임에 갇히기 쉽다. 몽테뉴가 『에세』에서 실험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였듯이 수필은 의식과 의미와 구성에서 어느 장르보다 확장성을 지니는 문학이다. 확장성을 추구하는 수필은 장르의 변용을 강조함으로써 계속 쓸 수 있는 텍스트성을 가질 수 있다. 최근의 사이버리즘 환경을 고려하면 수필은 더더욱 비평에 구속당하지 않는 아방가르드적 장르인 셈이다. 이것은 수필이 20세기 초반기의 아방가르드 사회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사이버리즘적 환경에서도 전위 문학의 중심에 놓인다는 추론에 다다른다.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된 예술 전위운동을 일컫는 문화용어이다. 프랑스에서 유래하였던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선발대(Vanguard)를 의미하는 군사용어였지만 지금은 예술, 문화 혹은 정치 분야에서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는 작품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예술과 문학의 역사는 전통과 전위의 갈등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존 가치에서 벗어나려 한다.


  20세기 초 전통적 창작론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자기 해방과 문학의 지평을 넓혀온 아방가르드는 세기말이라는 상황을 중요시하였다. 21세기의 뉴밀레니엄에 대처하려는 의지 또한 아방가르드 정신에 일치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기계문명과 일상 경험의 모순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경험의 원인과 결과가 더 이상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상황은 예술가에게 시대상황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노력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실험적 운동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아방가르드는 그가 창조해낸 것보다 그가 거부한 것에 의해 더욱더 정의가 잘 내려진다.”고 하였다.
  21세기 후반기의 아방가르드는 예술이라는 영역과 사회문화 현상을 결합한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적 환경과 달리 사이버리즘시대의 아방가르드는 민중, 자주, 주체, 해방, 계급, 그리고 반외세에 도전하면서 사이버문학, 민중미술, 부조리극 등의 낯선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게오르크 루카치가 아방가르드를 ‘부르주아 사회의 최종적 타락’이라고 비난하지만 독일의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물화되고 소외된 사회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긍정적으로 풀이하였다. 이처럼 현대의 아방가르드는 기존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변증법적 진화라고 볼 수 있다.
 
   2>오차숙의 수필론
 
   한국의 경우 아방가르드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부정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후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진정한  아방가르드는 형식이 아니라 정신에 있으며 예술 규범을 현재적 상황으로 개선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21세기의 한국수필도 현실에 적극 대응하면서 사회를 발전시키는 변용의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현대문학으로서 민족수필을 현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의미의 개방성을 옹호하는 롤랑 바르트가 시니피앙으로 생산되는 글쓰기가 작가와 독자의 공동 자산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내면 21세기의 한국수필이 가야 할 노선의 방향은 더욱 분명해진다.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을 모아 텍스트를 진화시키는 개방성은 어찌 보면 한국수필이 추구하여야할 진로로서 아방가르드적 글쓰기를 새롭게 구현하여야 한다는 제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차숙 수필가는 아방가르드적 반동, 다시 말하면 루카치가 말한 쓸 수 있는 텍스트성과 로랑 바르트가 말한 글쓰기 흔적을 모아 한국적 전위수필을 실험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수필 문단에서 항상 주목을 받고 있는 그의 작품을 요약하는 담론은 실험성과 현재성으로서 전통 수필론을 거부하고 모던한 수필론과 창작론을 구현하려는 성과에 해당한다.
 실험수필의 기수라고 불리는 작가는『수필문학의 르네상스』의 서문 <나의 수필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수필을 종합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다원주의 시대에 문학은 장르해체가 되고 있으며 작가의 자유로운 의식과 무의식, 독특한 몸짓만이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마음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앵글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독자의 영혼을 위로시킬 수 있다면,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기법이나 소재의 종류 ― 작품의 냄새와 표현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수필을 문학의 하부장르가 아니라 종합 인문학으로 간주하는 오차숙에게 ‘독특한 몸짓과 무한한 상상력’은 그가 정립하려는 수필론의 본질을 뚜렷이 알려준다. 
  소재와 기법과 표현을 부단하게 해체하는 그의 ‘낯설게 하기’는 문예사조에 근거하는 미적 행위에 속한다. 문학과 예술을 접목한『번홍화』,한국 수필계에서 최초의 성에세이집으로 불리는『가면축제』를 위시하여『음음음음 음음음』이 공통적으로 지닌 전위성은 “독특한 몸짓으로 영혼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선구적이고 전위적 형식의 융합을 의미한다.
  「생(生)은 한판 춤사위로세」에서 “정통성에 따르지 못하는 ‘적지 않은 무례함’을 범하고 있다”고 자인하지만 반전통성은 ‘보헤미안의 성향’과 ‘삶의 원동력’을 생산해낸다. 그의 문학세계를 정의하는 “무의식, 반전통성, 상상력, 변용, 보헤미안”을 종합하면 아방가르드적 글쓰기의 방향과 결과가 더욱 뚜렷해진다. 텍스트로서 수필이 낯선 형식과 낯선 언어와 낯선 구성으로 이루어져 바르트가 지적한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쓰기 텍스트’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렇듯, 오차숙이 실천하는 아방가르드는 20세기의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거나 서구의 물질화된 세계화를 모방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21세기의 문화사조인 사이버리즘, 포스터모더니즘, IT공학이라는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수필문학을 펼쳐내고 있다.
 
  3>아방가르드와 수필적 변환과 융합
 
  오차숙이 추구하는 수필은 형식에서는 굿춤, 언어에서는 마당극과 랩의 결속, 소재에서는 대중문화를 융합하는 성향을 지닌다. 전통적인 굿의 율동과 판소리 담론과 사이버리즘 시대의 랩의 가사를 합친 수필을 작가는 “생의 한 판 춤판”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작품마다 다른 미적 구조로 이루어지는 수필은 “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는 말처럼 작가의 결기를 ‘춤’과 ‘춤사위’로 구현한다. ‘춤사위’로서 오차숙의 수필은 독립영역을 구축한다. 외적 강박의식에서 벗어나 내적 실존성을 확립하려는 그에게 수필가라는 신분은 무희와 무속인처럼 영혼의 전령 역할을 수행하면서 외부 검열과 통제에서 벗어난 상상의 세계로 몰입한다.


  오차숙은 기성문학은 불임되어,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미적 해방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서정주의와 리얼리즘을 탈피한 낯선 형식과 신성한 정신계를 확대하는 것으로 “그 무엇과도 통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오차숙은 우선 기존의 언어체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다양하고 부조리하므로 고착된 문법은 현대사회의 삶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긴다. 격의 없는 판소리와 사이버리즘 세대가 애용하는 랩송이 규범화된 언어형식을 거부하고 구어적인 문체를 펼쳐낸다는 점에서 비선형적 글쓰기가 오히려 체계적인 문법구조보다 현대인의 표현에 더 적절하다.
  하이퍼텍스트가 지닌 언술은 지금까지의 수필이 보여주지 못한 낯선 음운체계를 만들어내므로 오차숙은 상상력을 구속하는 문법체계를 보다 자유롭게 변형시키려 한다.


  그 첫 번째 실험은 문장의 방점인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음음음음 음음음』에 선정된 그의 수필을 살펴보면 몇몇 예외를 빼면 어떤 수필에서도 마침표를 찾을 수 없다. 문장을 종결하는 부호로서 마침표는 의미와 의식의 흐름을 단절하므로 수필을 “무의식의 멜로디”로 간주하는 오차숙에게 인위적인 부호는 허용될 수 없다. 굿과 랩의 구어문에서 마침표가 무의미해지는 경향도 무의식적인 발화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소통의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후렴구가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후렴은 단락을 구분하고 화자가 표현하려는 내용을 고조시켜 주는 효과를 지닌다.「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에서는 “아닌가, 않은가, 됐나, 때문일까”라는 물음형 어미,「나의 삶, 나의 문학1」에서는 “때문이오”라는 이유를 제시하는 어미,「경계선을 뛰어넘은 핏줄」에서는 “∼렸다”라는 결의형 어미가 발견된다.
  「생은 한 판 춤사위로세」와 「차라리, 구명조끼를 벗고 싶다」에서는 “싶다”로서 소망을 나타내고 「장르를 뛰어넘어」에서는 “있다”는 명제 제시의 어미가 각각 되풀이된다. 서두에서도 동일한 문장이 후렴처럼 반복한다.「밧줄 위에서 추는 춤」이 “보소, 보소, 들어보소”라는 청유형 동사로 시작하고, 표제작 「음음음음 음음음」에서는 “생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방안에서 상념과의 싸움」에서는 “음음 그래도 그렇지”라는 문장이 단락 앞에 놓여진다. 후렴구는 영시의 각운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면서 산문체 문장을 사설조의 구어체로 전환시켜 무당의 굿 같은 주술적 효과마저 지니도록 해준다. 이러한 느슨하고 낯선 형식의 수필이 한국적 정취를 형성해낸다고 여겨지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음절은 “음”이다. “음”은 모든 소리(音)를 대변한다. 판소리의 추임새이고 랩송의 기본음으로서 “음”은 고통을 토해내는 소리이다. 깊은 사색에서는 감탄조로 바뀌고 영적 개안의 순간을 알려주기도 한다. 더욱이 억제하기 어려운 고통과 성적 희열을 표현하는 소리라는 점에서 원초적인 감탄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효과로 인하여「음음음음 음음음」을 위시하여「방 안에서 상념과의 싸움」,「무인도, 그 섬에는 파도가」,「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에서 되풀이된다.
 
4>소재의 전위성과 대중성
 
  통사적 일탈과 음운론적 변용을 꾀한 오차숙의 수필은 재미와 유희를 중요시하는 대중문화에 기반을 둔다. 광대굿, 무당굿뿐만 아니라 <그을린 사랑>과 <아이 엠 러브>는 대중영화와 남사당패의 줄타기를 모방하고, <무인도>와 <빛과 그림자>처럼 대중가요를 빌려온다. 「명작에서 훔친 사랑의 논쟁」에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제인 에어』가 지닌 사랑의 주제를 도입하고 있다. 상류계층이 즐기는 품격 있는 명곡과 명화보다는 보통사람이 즐기는 문화를 퓨전화 함으로써 열린 수필과 마당수필이라는 전위성을 도모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차숙의 수필은 점잖은 규범에서 벗어나 대중과 호흡하지만 속중성과 키치화를 벗어난 웰빙수필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그 의식을 「나의 삶, 나의 문학1」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눈을 감고 지그시 ‘삶’을 응시 해보고 싶소.
세상에 선연한 흔적이 남지 않더라도 앉았던 자리에 엉겅퀴 한 포기 키우고 싶소 이 땅은 영혼을 풀어 넣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오 (중간 생략)
春도 회색지색
秋도 회색지색
굿마당으로 흥(興)을 부르는 혼(魂)바람이기 때문이오
 
   오차숙에게 문학이라는 공간은 삶의 혼을 부르는 굿터이다. 문학이라는 영역에 삶의 세계를 융합하는 오차숙은 “흥을 부르는 혼 바람”을 닮은 글을 쓴다. 원래 굿은 죽은 자의 한을 풀고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하기 위하여 가무를 행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제의의식을 지닌 한국의 굿은 외래 종교가 번창하고 사이버리즘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존재한다.
  굿이 단순히 기복의식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원리이다. 원형리정은 만물을 낳고 기르고 수확하고 저장한다는 뜻으로 굿이 펼치는 생사와 부활의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오차숙은 전통적인 굿과 현대적인 랩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어 “굿마당으로 흥(興)을 부르는 혼(魂)바람”인 아방가르드 에세이를 구현한다.
   작가가 굿의 담론과 춤사위에 관심을 보여주는 요인은 제주도 출신이라는 태생에서 찾을 수 있다. 육신의 고향이고 영혼이 안식하는 터전이고 아버지의 피 묻은 환상이 잠재하는 제주도는 바람과 파도와 여인성으로 인하여 오차숙의 문학적 성역으로 자리한다. 그는 오랫동안 서울에 살았지만 수필을 통하여 자신을 고향으로의 귀환을 꿈꾸는 영적 추방자로 간주한다.「밧줄 위에서 추는 춤」과 「방 안에서 상념과의 싸움」은 상상의 원천이 제주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
 
보소보소 들어보소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300호(戶)도 안 되는 눅눅한 마을 바닷물의 소금기와 제주 햇살의 강렬함을 자궁에 끌어안았던 그곳 느닷없이 내리치던 천둥과 번개 속에서도 표정 없는 여자처럼 20년 가까이 살았으니 그 마을을 내 삶의 영역에서 접을 수 있겠소이까 이제 그 고향을 찾아가 해산물을 채취해 넣는 망사리 자락까지 뚝뚝 잘라 남은 삶을 항해하게 해줄 태왁 만을 의지하고 정신력 하나 둘러메고 검푸른 바다를 질주해 보겠나이다
 
  「밧줄 위에서 추는 춤」의 제4곡에 해당하는 위 단락은 어촌의 딸인 오차숙에게 제주도가 어떻게 문학적 고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를 그려낸다. 바다와 고향에 매인 영혼과 육신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현대수필』이라는 수필부락에서 이십여 년을 보냈을지라도 “고향마을에 벌레들이 심호흡할 움막 한 채 마련”하고 싶은 꿈과 “오조리의 여인”으로 회귀하겠다는 욕망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한 욕망이 존재하는 한, 그는 글을 쓰고, 육지의 이방인 작가로서 아방가르드 수필을 구현하게 된다. 나아가 그는 동일한 꿈을 꾸는 인간에게 ‘춤사위’로서 영매 역할을 자임할 수 있다.
   제주도가 지닌 지역성과 민중성은 오차숙의 아방가르드 특성을 확보해 준다. “무인도, 여름, 모기, 무덤, 파도”와 같은 물상이 “죽음, 고독, 명예, 영혼, 고통” 등을 의미하고 바다는 “혼백의 겁”으로까지 표현된다. 이런 상관성은「차라리, 구명조끼를 벗고 싶다」, 「방 안에서 상념과의 싸움」,「안식을 모르는 영혼」,「무인도, 그 섬에는 파도가」라는 것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가요 ‘무인도(無人島)’는 나에겐 가슴 벅찬 대형 거울이다.
이 곡에는 패티김의 ‘빛과 그림자’,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내포된 듯하여 그 영혼들이 울부짖는 메시지, 아니면 내가 그 영혼들을 위로하는 관점에서 음미하는 곡이다.
나는 이 가요를 감상할 때면 기쁨과 슬픔, 그에 대응하는 무거운 에너지가 파도처럼 몰아친다. 때로는 고요함 속에서 숨죽여 우는 파도의 춤사위, 때로는 갈매기의 깊은 밀어(密語), 때로는 붉은 햇살의 부르짖음으로 다가와, 숨통을 조일 때가 많다.
 
   작가는 왜 “무인도”에서 죽음을 떠올리는가. 그에게 무인도는 아버지가 부재하는 곳이고 굿녀가 살풀이춤으로 혼백을 거두는 곳이다. 오차숙도 글을 쓰는 딸로서 아버지의 혼백을 위로하여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 한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춤사위와 같은 무대와 언술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아방가르드 수필 영역이 필요한 것이다.
  「음음음음 음음음」은 오차숙의 문학 혼을 종합적으로 구현한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수필은 “한 판의 그래픽 소설”이고 “한 판의 춤사위”라는 그의 수필론을 구현할 뿐 아니라 운율과 가락으로 청각에 호소하고 마침표와 쉼표를 생략하고 단락을 연(聯)으로 바꾸어 구어체 문장을 펼쳐낸 기법에서도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구조에서는 “노래하는 무대”와 비슷한 공간으로 설정·설치된다.
  서두는 무대설치와 등장인물과 배경을 등장시키는 지문 역할을 하며 본문은 ‘생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라는 마당극을 펼치면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후렴으로 마당극, 판소리, 굿의 분위기를 조성해낸다. 등장인물에서는 “남사당패, 광대, 춤꾼, 백남준”을 등장하여 <나의 수필 쓰기>에서 천명한 ‘수필은 종합문학’이라는 이념을 가시적으로 구현한다.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오호라 맞소 난(蘭)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고 오호라 웬걸 미안하오 난 한 그루를 키우다 보니 권태로 인해 힘들어졌소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고 오호라 여전히 암 말 마소 난 한 그루 생(生)하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바람과 구름은 남사당패로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구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중심어인 난(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차숙의 “내 전부”이다. 난은 존재이고 생명이고 그 자체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잠시 눈길을 멈추면 시름없이 죽어가는” 수필을 위해 혼신의 춤사위를 이어오고 있다.
“호호탕탕 신음”을 토하고, 기력이 빠지고, 피범벅이 되어도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라고 관객과 독자를 격려한다. 그의 춤판에서는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 이것은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생(生)하기”이다.「음음음음 음음음」에서 울리는 “음음음음”이 오차숙의 목소리인 까닭은 가장 고통스러운 영혼이 작가의 예술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상과 지옥 사이에 있는 연옥의 세계”에서 풀어내는 아방가르드의 언어는 잠든 영혼을 일깨울 수밖에 없다.
 
  5>닫으며
 
  아방가르드 수필은 ‘계속 쓸 수 있는’ 텍스트로의 진화를 거친다. 그것이 지닌 비선형성과 실험성은 민중성과 개방성을 보장해주므로 오차숙의 수필은 현대성을 표방하는 문학이 된다. ‘음음음음’의 춤판이야말로 작가와 독자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작가와 독자가 동등한 주체가 되는 심미적 터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언어와 형식과 의미를 융합하는 오차숙의 전위적 수필이야말로 현대수필의 길잡이라는 역할을 담당한다.
  수필은 인생의 네트워크라고 말할 수 있다.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수필은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형식과 내용의 변용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오차숙이 이루어낸 언어와 춤과 음악과 연극적 요소로 이루어진 퓨전은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쓰고 읽는 영역을 넓히고 사이버리즘 환경에 부응하는 성공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오차숙은 사이버리즘 시대의 한국수필이 지녀야 할 전위성을 이끌어가는 선봉이라 하겠다.
[출처] 박양근 교수의 오차숙 수필읽기 - 아방가르드와 융합의 미학|작성자 sokook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