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맞이>


큰일 맞이가 될 일이 곧 다가온다.

한가위 명절맞이도 아니고  먼데서 오시는 손님 맞이도 아니다.

한 여인의 부고가 곧 있을 예정이니 이 일이 내 큰일 맞이가 아니고 무엇이랴.


몇달전부터 줄어든 식사량이 한달전부터는 식음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것이 급속도로 건강악화를 부추키어 

물한방울 못먹고 죽 한숟가락도 못삼키는 처지가 된 것이다. 

특수링거를 주렁주렁 메 단채 밥투정이나 하는 듯이 태평스러워보인 시절도 잠깐 있었다.

허나 그뿐, 이제는 정신이 혼미하여 기도로 넘어가는 음식의 개폐작동에  전혀 의식적 제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강섭취는 완전 금지되었다.

어떻게든 곡기를 넣어보겠다고 코로 혹은 옆꾸리로 바로 음식을 투여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담당의사와의 상담속도보다도 

수면상태에서 바로 의식불명으로 교차되어 가라앉아버린 그녀의 침몰이 너무나 빠르다. 

눈앞에서 그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험만을 남길 판이다. 

어떻게 손을 써야하는지 우리 식구회담 하는 것이 

마치도 세월호 침물을 코앞두고 우왕좌왕 하는 모양새와 뭐가 다를바냐.

피지도 못한 생명들 수백명이 몇시간째 기체호흡이 끊어지는 불가항혁의 순간을 견딘다고 상상해보면 

등골이 오싹하고 치가 떨린다.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순간도 참아야 한단 말인가.

안타까움이 노여움으로, 애처로움이 비참함으로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게된다.

바다속에 갖힌 생명들이 팔을 내밀어 잡아달라고 아우성인듯하다.

.구할수있을 것 같았는데 못구하는 것, 

살릴수있는데 못 그러는 것에 대한 시각적 고통은 즉각 

내 영혼 깊이  박힌다.  


꿈많은 소녀였는데,  소녀시절 시를 읽고 글을 짓던 그녀였는데.

바다에서 그러한것처럼  병실에서도 그러하지 않는가. 왜 살리지 못하는가.

육신과 의식이 이미 회복할수 없는 지경인 것을. 

피지못한 생명을 안고 사라지면서 다가오는 이, 

살아있으나 죽음과 맞껴입은 안팎이 붙어있는 이

나의 친정엄마.

세월호 아이들처럼  

나이 든 나의 노모도  고이 꾼 꿈을 못펼쳐봤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의 삼각배가 심한 몸살을 앓는다.

이 세상과의 이별을 산자 들의 몫으로 남긴채.

의식이 사라지는 엄마는 죽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이쪽이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하고 소리를 아무리 질러봐도

엄마는 나빠지기만 하는 쪽으로 내달린다. 마치 그 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는 것 같이. 

의식을 잃고 물흐르는 대로 떠밀려가는 엄마는 순항하는 것일까?

가슴에 자식을 묻은 부모는 하염없는 바다를 지켜보겠지만, 

어미잃은 나는 차거운 회색 병실을 오매불망 그리워 해야하나?


엄마는 도망가듯 멀어지는데 

나에게는 "큰일 맞이"의 어떤 것이 차오르는 것. 

알고도 찾아올 그리움을 온몸으로 맞이해야하는 것.

이것을 알아야 하나.

"비우고 채우는, 

  버리고 생기는,  

  보내고 맞이하는  그런 철학적 게이지" 는

실제로 존재하는 가 보다. 


사랑해요 엄마

엄마는 미래를 꿈꾸었던 천사였어요. 

꿈구었기에 반항 많은 천사였고요. 

엄마, 아직 끝내지 말아요. .

꿈꾸는 거 멈추지 말아요.

반항마저도.



(*)2014년 5월24일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