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음새로 붙어 있다. 천지 사이에는 지평선이 있고 하늘과 바다 사이에는 수평선이 있다. 남녀 사이에는 아이가 있고 늙음과 어림 사이에는 젊음이 끼어 있다. 만일 중간에서 서로를 붙여주는 중간자가 없다면 세상은 늘 아비규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말도 마찬가지이다. 말이란 원래 확 뱉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분석하면  말은 단음에서 시작하였다. 빙하기 말기에 태어난 원시인들이 울창한 들판을 쏘다니다가 무시무시한 동물을 만나면 “악”하고 도망을 쳤다. 만만한 사냥감을 만나면 “얼씨구” 화살을 날렸고, 예쁜 여자 원시인과 마주치기라고 하면 “어어” 하고 말문이 막히곤 했다. 원시언어는 설명이나 묘사보다 어조나 어감으로 상황을 전달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인간은 무리를 만들면서 점점 사회적 동물이 되었다. 말도 많이 하고 표현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고민거리가 생기면서 남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고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서 혼자 중얼거리게 되었다. 철학적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나아가 빈말과 헛말과 거짓말이 횡행하고 은유와 비유라는 수식어가 곁들여지면서 몸싸움보다 무서운 말싸움이 생겨났다. 문학적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남자들은 말재주가 좋으면 세치 혀를 굴려 먹고 살 수 있음을 알았고, 여성들은 말솜씨로 남자를 녹이고, 싸움 붙이고 심지어 그들을 지배할 수 있음을 체득하게 되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가 입증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최초의 세계대전인 트로이전쟁도 아름다움을 다투던 세 여신 사이에 벌어진 언쟁 때문이 아닌가.


끝내 말이 많으므로 엉뚱한 문제가 생겨났다. 혀가 제멋대로 구르면서 머리와 가슴이 시키지 않은 설익은 말까지 하게 되면서 쏘아버린 화살처럼 주워담을 수야 없지만 앞말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때 생겨난 신통한 연결어가 “그러나”이다.
널리 알려진 천문학자인 갈릴레오는 “그러나”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에 속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처럼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부닥치자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말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지켜야 할 과학자였다. 목숨을 건진 후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러나 지구는 계속 돈다”고 슬며시 입장을 바꾸었다. 그 후 그는 “그러나”라는 세 음절로 생사기로에서 말의 수사학 덕을 본 저명인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는 앞서 한 말이 아니라 뒤에 한 말이 본심임을 일러주는 접속사다. 변명과 회피와 면피의 “그러나”는 인간이 처음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당연히 하느님이 창조하여 인간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분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껴 “그러나”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이다. 
<창세기> 제1장은 우주 생성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창조주는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있었다”고 하여 말의 힘을 강조한다. 빛에서 나무까지 창조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되풀이 사용한 접속사는 “그리고”다. 하늘 그리고 땅을 창조하고, 낮 그리고 밤을 만들었다. 하늘과 물도 구분하였다. 그런 다음……, 그런 다음……, 이렇게 하나씩 천지를 만들어 갔다.


흥미로운 부분은 <창세기> 제2장 6~7절에 나오는 인간창조에 대한 내용인데 그때 처음으로 “그러나(BUT)”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하느님은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다. 그러나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온 땅을  적시자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셨다.” 그렇게 “그러나”라는 참으로 기묘한 말이 인간과 더불어 만들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궁금한 대목이다.


왜 신은 인간을 만들 무렵에야  “그러나”라는 말을 불현듯 떠올렸을까. 흙으로 인간을 빚으면서 태어나지 않아야 할 인간을 만들어버렸다는 자책감을 무심결에 실토하신 것일까. 사람이든 신이든 저지른 행태나 뱉은 말은 돌이키기 힘들다. 전지전능한 신도 말에서는 실수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허다한 말 중에서 인간에게 “그러나”를 가르쳐준 것을 후회하실지 모른다.
그러나, 신은 심약한 인간을 긍휼히 여겨 “그러나”라는 변호수단을 부여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