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양식의 커피를 좋아한다거나 당분에 녹은 오렌지나 과일즙을 즐겨 마시는 것도 아니다. 목이 마르면 냉수를 찾고, 생수를 들이켜는 게 나의 버릇이다. 뭐든지 별나면 불편하다는 생각에서 차를 마시지 않는다. 어쩌다가 녹차를 마시는 경우가 있으나 전통찻집을 예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통찻집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혹하여 일단 들어서면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기분이 아늑해지기는 한다. 그래도 국화차나 둥굴레차와 녹차를 제외하면 냉큼 주문할 전통차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으니 한심하기만 하다. 
나는 전통차를 마실 여유를 모른다. 그럴싸한 핑계인지 모르지만 예법을 귀찮게 여기는 버릇이 내겐 있는가보다. 서구의 편의주의가 몸에 배어 절차를 따르는데 걸리는 시간이 아까워서일 것이다. 게다가 일단 무엇을 시작하면 이래저래 갖추어야 할 물건들이 많아진다. 내 연구실에 깔린 것이라고는 잡스러운 책과 원고와 종이뿐이고 태반의 시간을 글 쓰는데 보내는 터라 손수 물을 끓일 겨를이 없다. 식음의 버릇이 후천성이라는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나는 차를 음미할 줄 모른다. 이것만큼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속보이도록  말하자면 차를 제대로 음미만 할 수 있어도 공짜로 마실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법하다. 왜 아니 좋은가. 포근한 자리에서 한복으로 단장한 다주가 정성스럽게 다려주는 차의 향을 음미하면서 맛을 평할 수만 있다면 이래저래 사귐의 자리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와인처럼 음미할 정도라도 되면 조금은 쉬울 듯한데 불행하게도 내 혀는 술에 저리고 자극성 음식에 마비되어 전통의 맛을 놓쳐버렸다. 그나마 나만의 잘못이 아니니 무지의 변명이 통할 듯하다.


나는 차를 제대로 간수할 줄 모른다. 모순된 이야기이지만 내 방에는 차를 담은 통이 꽤 있다. 학생들이나 방문객이 선물로 가져온 것인데 지리산 작설차, 중국차, 일본차, 스리랑카차, 심지어 인도차도 있다. 차를 즐기지 못하는 셈 치고 원산지가 다양한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선물로 받은 차를 놓을 데가 없어 책장에 진열해두었는데 방문객이 내가 차를 좋아한다고 지레짐작하여 선물한 것이다. 지난달에도 누군가 차 한 통을 두고 갔다. 본인에게 미안하지만 반 달이 지나도 아직 포장을 뜯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이 글을 발표하면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자못 궁금하다.


나는 차를 달일 줄 모른다. 차를 달이는 순서를 어슴푸레 짐작은 하지만 다도회의 엄숙하고 진지한 광경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제 나이도 나이인 만큼 느긋한 시간을 갖고 차를 베푸는 법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불심에는 차공양이 있다는데 주위 분들에게 차를 바치는 일도 적공이 되리라 여긴다. 그런데 물을 끓이고 다기를 손보고 차를 대접하고 다시 다기를 정리하는 절차가 예사가 아닌 듯하여 조급증이 적잖은 나는 망설여진다. 귀차니즘과 빨리 증후군에 빠진 내가 가련해진다.


나는 다기의 쓰임새를 모른다. 차를 마시려면 주전자와 찻잔이 있으면 족할 듯싶다. 만일 그것이 없으면 손가락을 데지 않을 정도의 종이컵도 상관이 없을 듯하다. 편의주의라는 말을 빌린 셈이다. 그런데 전통찻집이나 도자기 상점에 들러 구경을 할 때마다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다. 그 종류며 모양이 너무 다양하여 모두 갖추려면 비용도 만만찮다 싶다. 다기의 격을 모르면서 차 맛을 과연 알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차에 대한 글을 쓸 줄 모른다. 다모임을 소개하는 회지를 간혹 얻어 읽기도 하고 차를 소재로 한 시나 수필을 읽으면서 그 여유의 멋을 부러워하지만 내가 차에 관심을 가지도록 해주는 글을 만나지 못하였다. 내 탓이지만 차에 무관심한 이유의 백 분의 일 정도는 글 쓴 사람의 책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차를 마실 줄 알고 다릴 줄 알고, 차에 대한 지식을 득하여야 글을 쓸 텐데 그러지 못하니 이 글이 졸문임은 사필귀정이다.


그런데 어쩌다 차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당연히 차에 대한 무지의 고백서가 되었다. 차라리 그 무지를 고해하는 참회록을 쓰라면 더 진솔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 남의 탓이 과연 필요한가. 차를 아직 못 마시면 다시茶詩를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혹시 차에 관한 이야기를 꿰뚫고 있는 어느 다인茶人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도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듯 내게 다예를 일러줄 자비심을 베풀어주시지 않을까 하여 내 무지를 주저리 고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