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영역은 너무나 넓고 멀다. 아마 어떤 수필가라도 서사의 끝에서 서정의 끝까지, 사물수필에서 관념수필의 깊이까지 다다를 수필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수필이므로, 고정된 구조가 없는 산문이므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 하여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가. 아니다. 수필이 문학이 되려면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문학이 지녀야 할 주제와 제재와 문체가 일정 수준을 넘어야 한다.
여기에 책을 내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 사이에 수요와 공급의 룰이 생겨난다. 그것은 좋은 글을 만들고 싣는 것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발행인의 안목과 작가의 창작력이 조응한다는 것이다. 좀 더 풀어 말하면 잡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좋은 작가를 스카우트하려고 애쓴다. 인력시장에 헤드헌터(head-hunter)가 있다면 문단에도 하트헌터(heart-hunter)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작가의 입장에서도 가능한 권위가 있고 질 높은 잡지에 게재되기를 바란다. 이럼으로써 자신의 글이 작품답게 인정받고 빼어난 작가의 그림자 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수필전문지라기보다는 수필동인지를 발간한다. 그러니 이런 코너에 의견을 표명할 자격이 있는지 은근히 조바심이 쳐진다. 그러나 수필잡지란 잡지는 거의 받아 읽으면서 느끼는 바는 수필전문지마다 작품의 기복이 생각 이상으로 심하다는 점이다. 어쨌든 수록된 수필을 읽어보면 몇 편의 스타 작품이 반드시 눈에 뜨인다. 그만큼 잡지발행인은 질 높은 작품에 목마르다는 뜻이고 좋은 작품에 대해 비슷한 기준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 무언의 공감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작품으로서 제 모습을 갖춘 수필을 말한다. 수필을 정의하면 과거의 삶을 미학적 구조로 정리하여 독자와 감동과 공감을 소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을 잊고 자신의 생활을 독백하고 전시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면 오늘날의 수필이 얼마나 진보되고 발전하여왔는가를 모르는 셈이다. 그 글은 하수下手에 속한다. 그런 부류의 글을 볼 때마다 왜 이런 글이 잡지에 실려 있을까 하고 한탄하게 된다. 실어주지 않으면 아니 될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 경우는 제대로 된 글도 잡지도 아니다.
다음의 부류는 최소한 하나의 장점을 가진 글이다. 문장이 좋거나 구성력이 치밀하거나 정서가 함축적으로 표현되거나 에세이답게 철학적인 글이다. 아니면 참으로 쉬운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글이다. 이런 글은 중수中手로서 글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수필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다. 잡지에 실리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수준에 다다라야 할 것이다.


작가나 발행인이 간절히 바라는 글은 상수上手의 경지에 오른 글이다. 마지막 한 송이라고 부를만한 상수의 작품에는 기氣가 스며있다. 서기書氣가 담긴 글은 독자를 몰입시키는 흡인력을 지니며 글에 정진하는 작가들의 부러움과 시기심을 받는다. 잡지발행인은 그런 글을 쓸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감별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수필을 위해 잡지를 발간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잡지발행인이 원하는 수필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잡지발행인이 싫어하는 수필을 말하는 게 더 편할 것이다. 무엇보다 문장이 안 된 글이다. 단락 정리가 안 되고 조리가 맞지 않고 맞춤법이 틀리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널리고 수필가네 하는 오만이 흐르는 글이다. 수필은 사람이라 한다. 수필을 읽으면 그 사람의 성격은 물론, 지적 정서적 수준마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무서운 수필을 함부로 쓸 수 있는가. 아무거나 실을 수 있는가.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수필가가 된 사람들의 이러한 글은 참으로 위태롭다 할 것이다.


읽기 싫은 글은 천편일률적인 내용이 많다. 표현과 줄거리도 범상하기만 하다. 그런 글은 고통이 없는 글이다. 삶에 고통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연민과 경애와 숭엄의 자세로 대상을 응시하지 못한 글이라는 뜻이다. 상상의 결핍증을 보여주는 이러한 글은 잡문에 해당한다. 문제는 자신의 글이 그런 부류의 글임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쓴 글을 출판사에 보내기 전에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임신을 하면 아이가 건강한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 초음파 검사를 한다고 한다. 분신과 같은 글이 어떤지를 모르면서 빛을 보게 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 할 것이다. 소위 이런 글은 아니올시다이다.


작품에 완성이 있는가. 수필을 도道라고 부르는 이유도 끝없이 창작의 길을 정진하는 데 있으므로 어딘가 흠결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지라도 한 편 한 편을 쓸 때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사과나무라고 생각하면 글은 어딘가 달라도 남다르다. 수필잡지 발행인들은 그 정성의 유무와 다소를 감각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런 글은 장래성을 가지므로 편집자의 책상에 오를 자격을 가지게 된다.

Çà幸
알다가도 풀기 어려운 것이 만남이다. 그것이 사람 사이든 사람과 자연 사이든 상관이 없다. 사람 사이에서는 만나다 보면 인연이 쌓이고 인연이 있어 만남이 되풀이된다. 장소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한 곳이 마음이 들면 자꾸 찾아가게 되고 마침내 그곳은 육신을 내려놓은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그 어느 경우든 나는 만남을 이루어주는 것은 신의 조화라고 믿는다. 신이라는 말이 뭣하면 조물주라 해도 좋고 운명의 장난으로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만남이 성사되면 그 대면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의 여부는 당사자에게 달려있다. 서로 무엇인가 느끼게 해주고 호감을 가지면 자주 보고 싶어지는데 한번 만나서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어느 한 쪽이 물러서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첫 매듭을 묶기보다 만남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지 모른다.


나는 간혹 산을 오를 때면 주변과 어울린 모양새를 살펴볼 때가 있다. 골과 능선이 어울린 모양이며, 계곡을 타고 물이 어떻게 흘러내리는가를 바라보면 발걸음이 심심하지가 않다. 조그만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도 나름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흐르는데 그래서 지세를 연구하는 학문도 있는 법인가 보다. 무엇이든 재미없다고 하면 싱거운 것이고 신비롭다고 여기면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그 비밀을 풀 수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잡풀들이 자라는 서식처도 예사롭지 않다. 항상 물기가 축축한 곳에서 자라는 풀과 바닷바람이 세차게 부딪치는 바위틈에서 자라는 풀이 다르다. 키가 훤칠하여 바람에 나부끼는 앞의 놈이 애처롭기 이를 데 없다면 절벽에 붙은 땅땅한 풀은 독수리가 바위를 움켜쥐고 있는 발톱 같아 바람이 여간 불어도 요동칠 것 같지 않다. 풀이든 사람이든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 상생의 화해를 이루는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이 자연을 가까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나 내게 산은 만남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교실이라 하겠다. 


요즈음 나는 바닷가 산길을 자주 찾아간다. 뚜렷한 이유는 찾지 못하지만 내 마음을 짐작하면 숱한 만남을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로를 따라 걸을 때면 아무리 그 전날 피곤하였더라도 걷는 동안에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검푸르게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고 왼쪽으로는 산바람에 너울대는 풀과 나무들을 눈요기할 수 있다. 귀가 열리는 것이다. 회색 도시에 찌들린 눈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모두가 다 그러니까. 그것보다는 책을 읽느라, 글을 쓰느라 초췌해져버린 내 마음의 주름을 펼 수 있다. 바다에서는 쉴 사이 없이 흰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고, 육지에 다다라 절벽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삶의 끝이 지닌 허망한 운명이 떠오른다. 그러면서도 단단한 대지에서 돋아나는 무수한 식물들이 오색의 꽃을 피워내는 생명을 바라보면서 대지는 바다와 달리 부동의 자세를 지켜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혈맥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다시 바다를 바라보면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갈매기가 하늘을 날다가 수면에 내려와 쉬는 검은 물체를 발견한다. 그 부동의 고요함에 취해 있다 보면 몇 마리 짝새가 포르르 날아가기도 하고 까만 박동새 두 마리가 소나무 가지에 앉아 밀어를 나누기도 한다.


예쁜 것,


내 귀를 열어주는구나.


때로는 일부러 험한 날씨를 골라 바닷가 오솔길을 찾아갈 때가 있다. 그때면 내리막길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기도 하고 평소에는 돌무더기가 쌓인 비탈을 따라 제법 세찬 물살이 흘러내린다. 하늘에서 내린 빗줄기가 모이고 불어나 아래로 흐르는 계곡과 폭포를 만나면 만남이 무엇인가를 새로 생각해 본다. 물방울이 모여 물살을 이루고 새순이 모여 녹음을 이루고, 낙엽이 모여 흙더미를 이루고 그러다가 홀연 눈앞에 탁 잿빛 바다가 나타나면 나는 여느 때와 달리 탄성을 지르는 것이다.


잿빛 바다가 맑은 날의 바다와 달리 음울한 소리를 낸다. 파도가 거칠게 일어나 애꿎게 바위섬을 몸으로 부딪친다. 일어나라는 몸부림이다. 그런 만남의 조화를 부리는 바다를 지켜볼 때면 거의 잊혀진 아픔의 순간을 떠올린다.

나는 바닷가 산길을 걸을 때마다 다행이다 하는 것 하나와 슬프다 하는 한 가지를 가지고 있다. 다행인 것은 부산이라는 도시에 살면서 바다와 산을 도시에서 바라볼 행운을 얻은 것이고, 애석한 일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언젠가는 이 길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그 길을 걸으면 그런 부러운 맘 반, 아쉬운 맘 반을 가질 것이다.
이런 만남을 주신 조물주에게 어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