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여성들은 내 외모를 요리조리 쳐다보다가 기어이 말을 건넨다.

“어쩌면 손이 요리도 작네요.”

상대방에 대하여 칭찬 반 조롱 반의 인사치레를 하고 싶은데 마침내 말감을 찾아냈다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건드리는 신체가 모두 손이다. 키가 작다고 말하고 싶지만 체면을 건드리는 것 같고 눈이 작다고 하면 자존심을 건드릴까 과녁을 만만한 데 돌린 것이다.

사실 내 손은 작다. 그래서 그런지 팔 길이도 짧아 처음 사는 옷은 반드시 수선점에 맡긴다. 그럴 때마다 조금의 콤플렉스를 느낀다. 여자의 권력은 아름다움에서 나오고 남자의 권세는 크고 강한 데서 나온다. 손이 솥뚜껑만하고 장대 같은 키하고 황소 눈알을 가지면 그 남자는 힘의 상징이 된다. 남자에겐 힘이 권력이라는 뜻이다. 설상가상 나는 눈도 작고 귀도 작다. 그러니 힘하고는 참으로 멀다. 가끔 사람들이 코가 잘생겼다고 보태주기는 하지만 손이 작다는 말에서 받은 상처를 메워주지는 못한다.

상대가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인다.

“손이 작으면 부지런하다 카데예.”

참았던 열등감이 튀어나온다. 나에게 시집왔으면 한평생 화장이나 하면서 살 건데 하는 아쉬움이라고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런 건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부지런하다는 건 열심히 산다는 칭찬이 아니라 고생바가지라는 비아냥이 아닌가.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는 특이한 변종일 뿐, 작으면 부지런하다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증명된 일반적인 정설이다. 과학적으로도 입증된다. 컨테이너 트럭의 커다란 바퀴가 한번만 굴러도 티코급 자동차는 세 번이나 재빨리 굴러야 같은 거리를 간다. 손이 작은 내가 바퀴 작은 티코에게 처연한 동료의식을 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손이 작은 나에게 부지런하다고 말하면 평생 고생이나 하라는 악담이 아닌가.

그런 말을 하는 여자의 손바닥과 마주 대보면 대부분 손마디 하나가 더 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날렵한 난 잎 같아요.”하고 칭찬해준다. 여자들은 손가락이 길다는 칭찬을 물 한번 안 묻히고 살 팔자라는 점괘와 같다고 믿는 모양이다. 고등학교까지 피아노를 쳤던 손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 주면서 해죽이 웃는 목선에서 노스탤지어의 여린 향기가 묻어나기도 한다. 그 현실의 모순은 멀리 있지 않다. 아내는 내 손보다 손가락 한 마디가 더 길지만 지금도 찬물을 묻히며 산다. 첫 며느리를 보아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으니 긴 손가락이 편한 팔자라는 말은 조금도 믿을 게 못된다.

남자는 손이 작으면 귀하고 여자는 손이 작으면 천하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그건 반어법의 극치다. 귀한 남자는 손이 작고 천한 여자는 손이 작다는 말로 전후가 바꾸어져야 된다. 흔히 맏며느리를 칭찬하여 손이 크다고 말한다. 집안대소사 때 음식을 푸짐히 장만하여 나누어 주는 부덕婦德을 손큰 맏며느리로 비유하지 않은가. 반대로 기생은 술잔이나 젓가락만 들다보니 손이 작아지기 마련이다. 여자도 살림이 힘들지언정 손이 작기를 기대하지는 않을게다. 남자도 분명 천한 작은 손보다는 넉넉하고 큰 손이 만든 안주를 푸짐하게 먹고 싶어한다고 믿는다.

예로부터 소심한 남자를 샌님이라 불렀다. 손이 작으면 체구와 심보가 덩달아 작아져 매사에 엉거주춤하게 된다. 농경사회에서는 일을 잘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손의 크기로 따졌다. 어느 손 작은 남자가 동네 부역을 할 때마다 슬쩍 새버리니 샌님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그래서 샌님이라면 책상다리를 하고 책을 읽는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요즈음에는 모든 일을 컴퓨터로 처리하지만 업무 분담을 관장한 조물주께서는 샌님에게 가벼운 붓대로 소임을 하라고 일을 주셨다. 그 유래가 맞다면 지금의 나에겐 퍽 다행이다.

내친 김에 욕심을 내어 해석을 달리 해 본다. 이번에 과학적인 논거다. 사지四肢의 크기에 따라 조물주가 역할을 분담해준 게 아니라 붓대로 글만 쓰다 보니 손이 작아진 것이다. 요즘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면서 손마디가 다시 굵어지는 것을 보아도 다윈의 진화론과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더 맞다싶다. 어쨌든 나도 생활인의 손을 가졌다. 조금은 위안이 된다.

큰 손에 대한 열등감을 깊게 자각한 때가 있었다. 어느 손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다. 미술에 조예를 가진 두 친구가 있었다. 서로가 상대방의 재능을 살려주기 위해 다투다가 한 친구가 식당 일을 하여 다른 친구를 도와주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 화가로 성공을 한 친구가 돌아와 이번에 그를 도우려 하였다. 마침 식당 친구는 떠난 친구가 성공하도록 힘든 일로 거칠어진 손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손은 너무 망가져서 붓대를 잡을 수 없었다. 화가는 그 손을 그렸다. 알브레히트 뒤러의「기도하는 손」에 담긴 일화이다. 그 손은 희생적인 우정을 보여주지만 노동과 예술이 상호 존중해주는 미담이기도 하겠다.

나도 노동자다. 글을 쓰는 정신노동자다. 글을 쓸 때마다 창작한다고 하지 않고 일부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에 맞추기 위해 공정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찬물에 설거지 하는 여성들에게 덜 미안하고. 육신의 땀을 흘리는 노동자들에게 덜 죄송하다. 태어날 때부터 작은 손을 가진 것은 부끄럽지 않지만 지금까지 손을 거칠고 마디지게 키우지 못한 게으름 때문에 그저 몸 둘 데가 없다.

문제는 유전이다. 작은 손도 유전되리라. 그런 탓인지 아이들은 모두 기계를 만지는 이과로 입학하지 못했다. 나처럼 가르치고 글 쓰는 걸 좋아하더니 사무직으로 진출한단다. 그러다가 대대손손, 손이 더욱 작아질지도 모른다.

“어쩜 손이 고리콤 작냐?”

그런 말을 들을 먼 손자들을 생각하면 더 먼 세상에서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땐 남자가 손이 작으면 귀하다는 귀품 있는 말도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게 아닌가.